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구설에 오를까 오랜 시간 참고 조심하며 견뎌왔다. 그중에 하나가 ‘삼철’이라는 공격이었다. 그는 지난 13일 <시사위크>와 인터뷰에서 “나쁜 프레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털어놨다.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학창시절 소설가를 꿈꿨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롤모델이었다. “누가 어디에 100권의 전집이 있다고 하면 그걸 다 읽어야” 직성이 풀렸던 만큼 헤밍웨이의 작품도 “거의 다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독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노인과 바다>다. 불굴의 인간정신에 대한 통찰이 “지금 생각해도 압권”이었다. 책을 좋아했던 소년의 별명은 ‘전봇대’, 때로는 ‘해파리’로 불렸다. 지금은 이름보다 ‘삼철’로 더 많이 불린다. 그는 바로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삼철은 전해철 의원을 포함해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양정철 전 홍보기획비서관을 묶어서 부르는 표현이다. 세 사람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함께 손발을 맞췄다. 당시 전해철 의원의 직책은 민정수석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나쁜 프레임’으로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배제해야 할 측근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대상으로 꼽혔다. 전해철 의원은 뒷말이 나올 것 같으면 지레 피했다.

◇ 문학소년, 민변의 전설, 최연소 민정수석… “이제 행복한 경기도 꿈꿔”

전해철 의원은 “그간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달려왔다면, 정권교체를 이룬 뒤에는 정말 대한민국의 앞날을 보고 가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늘 노심초사했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까 참고 조심하며 견뎌왔던” 시간이 길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 이후에도 불편한 상황은 계속됐다. 세 사람은 지난해 대선 이후 서로를 멀리하다 지난 10일 수원 아주대 체육관에서 열린 전해철 의원의 책 ‘함께한 시간, 역사가 되다’ 출판기념 북콘서트에서 처음으로 한 자리에 앉았다. 이날 이호철 전 수석은 “전해철이 잘 나갔으면 안 오려고 했다. 요즘 어려운 것 같아서 왔다”며 웃음을 자아냈고, 양정철 전 비서관은 “삼철은 없고 전해철만 남았다. 그간 희생과 헌신을 많이 해온 전해철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사실 전해철 의원은 특혜와 거리가 멀었다. 경기도지사 출마를 준비하기 위해 경기도당위원장직도 내려놓았다. 그는 지난 13일 <시사위크>와 인터뷰에서 “도지사 후보로 나가는 것은 도당위원장이 아닌 개인의 일인데, 공정성에 대한 우려가 있다면 사퇴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런 야무진 성격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좋아했다. 2004년 5월, 전해철 의원을 청와대로 불러들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업무추진력이 강하고, 주변의 신망이 두텁다”고 그를 소개했다.

전해철 의원은 1993년 해마루 합동사무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인권변호사’라는 공통점으로 동지가 됐다. 그는 소설가를 꿈꿨지만 가족과 주변의 조언으로 서울대 불문과 대신 고려대 법대로 진학했다. 고시 공부에 매달리느라 동기와 선후배들처럼 시위에 뛰어들지 못했다. 마음 한켠에 남아있던 미안함이 훗날 전해철 의원을 인권변호사로 이끌었다. 실제 사법연수원에 가서도 노동법학회에서 활동했다. 그는 “인권변호사로서의 길이 그때 이미 결정된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운명이었다.

전해철 의원은 “노무현 때문에 정치를 시작했고, 노무현의 가치가 정치 지향점이 됐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했을 때만 해도 정치인이 될 줄 몰랐다. 청와대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뿌리치고 대선자금 관련 수사에서 변론을 맡았다.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 대공사건인 ‘수지 김 사건’의 진실도 이때 파헤쳤다. 같은 당 이재정 의원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전설’이라고 말할 만큼 전해철 의원은 구슬땀을 흘렸다.

전해철 의원은 정치 개혁을 통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 ‘신뢰받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장에 동감했다. 그는 경기도민이 행복할 수 있는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은 노무현 탄핵 사태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 이후 업무에 복귀하자 전해철 의원을 찾았다. 부름을 다시 거절할 수 없었다. 2004년 5월 청와대에 들어가서 2007년 12월까지 3년8개월 동안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민정비서관에서 민정수석으로 올랐다.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 2008년 18대 총선 출마를 결심했다. 노무현의 가치 실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낙선했다. 준비기간이 짧았던 탓이다. 이후 원외위원장으로 지역을 지켰다. 그는 현재 경기 안산갑 재선 의원이다.

전해철 의원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는 두터웠다. 박연차 게이트로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을 때, 대통령비서실장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과 전해철 의원 이외의 “다른 변호사는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해철 의원은 지금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정권교체를 하고 나서야 “마음의 짐을 하나 내려놓은 것 같았다”고 말하는 그다. 경기지사 출마를 결심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선언문을 다시 읽었다. 출마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2%에 불과했다. 역전의 승부사, 그의 길을 전해철 의원이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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