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경제학자들이 '낙수효과 무용론'을 제기하고 있다. 사진은 2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OECD 정책 권고가 담긴 한국경제보고서를 발표하는 랜달 존스 한국경제담당관. <뉴시스>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빈 그릇을 채우면 아래로 넘쳐흐르는 물처럼, 상류층의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그 열매가 중산층으로, 다시 하류층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 경제활동의 저변을 확대시키기보다 일부 대기업 중심의 수출 집중화를 꾀하고,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을 옹호하는 ‘낙수효과’가 그것이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 낙수효과에 대한 신뢰는 전 세계적으로 점차 내려가는 추세다. 경제는 성장했을지 몰라도 그와 함께 나타난 소득불평등이라는 부작용이 부의 재분배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부가 재분배되지 않고 고소득층에 집중된다면 이는 ‘낙수’가 아니다.

◇ “재벌 중심 수출구조, 힘 잃었다”

OECD는 2년에 한 번씩 회원국의 경제동향과 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국가별 검토보고서를 내놓는다. 지난 20일에는 2016년에 이어 2년 만에 ‘2018년도 한국경제 보고서’가 발간됐다.

올해 보고서에는 세 가지 정책 권고가 담겼다. 거시경제 정책에 대한 조언과 중소기업의 역동성 강화, 그리고 대기업집단의 개혁이다. 이 중 한국의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다룬 마지막 항목에서는 약화된 낙수효과에 대한 평가가 담겨있다. 보고서는 “재벌이라는 이름의 대기업집단이 수출을 주도하는 한국의 전통적 경제성장모델은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썼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상위 30대기업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들은 지난 2006년경부터 급증했으며, 현재는 그 숫자가 당시의 두 배인 1,300여 곳에 달한다. 수출을 주도하는 거대기업과 이들에게 제품을 공급하는 중소 협력사는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제구조다. 그러나 OECD는 이와 같은 구조가 기업가정신의 발현과 창의적 경영활동을 제약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30대기업은 제조업 출하의 3분의2, 서비스 매출의 4분의1을 차지하며 한국의 산업구조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이 막대한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 동종계열사 간의 상호출자·순환출자 제한과 내부거래 규제 등 각종 제도들이 시행됐지만, 결국 경제력의 집중이 부패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한국의 실질 GDP성장률은 OECD 평균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노동생산성은 OECD 상위권 국가들의 46%에 불과할 정도로 낮다. 대기업의 3분의1 수준으로 떨어진 중소기업의 노동생산성은 다시 임금격차로 이어졌다. OECD는 지난 20년간 한국의 소득 하위 10% 근로자의 임금수준은 거의 오르지 않았다며 생산·수출구조의 불균형이 양극화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 부의 파도는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19일 서울에서 열린 ‘2018 경향포럼’에 참석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낙수효과를 가장 통렬하게 비판한 석학들 중 한 명이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스티글리츠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낙수효과를 강조한 미국식 모델은 실패했다”고 진단했으며, 국민총생산(GDP) 3만달러 시대에 접어든 한국이 이 혜택을 균등하게 누리지 못하는 것도 낙수효과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발언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본격화하고 ‘아버지 부시’가 답습했던 미국의 낙수효과 모델은 이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충실히 반복되고 있다. 현재까지의 경제지표로 보면 법인세·소득세 최고세율 인하를 골자로 한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안은 기업의 경영활동 제고라는 1차적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임금인상과 근로자의 실소득 증대, 궁극적으로는 한국보다 심각한 미국의 소득격차 해소에 도움이 됐는지를 판단하려면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전임자들의 정책에는 이미 실패했다는 평가가 내려진지 오래다.

1982년, 포브스가 처음 세계 자산가들의 순위를 발표했을 당시 미국의 부자 상위 400인의 재산 합계는 930억달러였다. 36년이 지난 현재는? 그 29배인 2조7,000억달러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2015년 발표한 논문에서 낙수효과를 완전히 틀린 이론으로 규정했으며, 워렌 버핏은 올해 1월 타임지에 실은 기고문에서 “부의 파도는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는다. 그저 점점 더 높아질 뿐이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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