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의 대마도 기행 4

▲ 하도겸 칼럼니스트
1971년 히타카츠 소학교 학생 김광화군은 뒷동산에 올라가 뛰다가 땅이 조금 꺼지면서 발이 빠진다. 발을 빼고 구멍을 보니 푸른색의 뾰족한 것이 있어 꺼내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나보다. 광형동모 또는 광형투겁창이라고 창끝의 뾰족한 부분인 이 유물의 발견이 계기가 되어, 나가사키현교육위원회는 발굴을 실시해서 미생(야요이) 후기의 상자식의 석관 4기를 확인했다.

토노쿠비(塔の首라고 불리는 이 분묘군은 기원후 1세기에서 2세기의 유적으로 우리나라의 무문토기와 북구주(키타큐슈)지역의 미생식 토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양국의 직접적인 관계와 교류를 한번에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에 일본 문부성은 1977년 2월 17일에 사적으로 지정한다. 하지만 1호석관은 얼마안가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게 된다.

히타카츠항으로부터 몇분이면 도착하면 이 유적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사기행에서 첫 번째 들리는 유명(?) 장소가 된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고고 발굴 탓인지 무덤에 물이 고여 배수 즉 물이 전혀 빠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토층(흙)이 약해져서 어린아이의 발이 빠지게 된 것인가 보다.

▲ 토노쿠비유적이 있는 언덕 <이하 하도겸 칼럼니스트>
이 고분이 위치한 언덕을 중심으로 앞과 좌우에 펼쳐진 주택가의 모습으로 당시를 생각하면 안될 듯 싶다. 태풍이나 해일 등을 고려해 언덕위에 무덤이 자리잡고 있었다면, 주거지는 어디였을까? 바다에서 불과 50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에 아마도 바닷가 평지는 아니고 좀 떨어진 평지와 구릉 저지대 정도가 아니었을까? 김해 양동보다 2세기정도 늦은 편년을 보여준 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당시 한반도와 대마도가 교역 등을 통해서 비슷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분에서 바라본 하늘, 산, 바다가 참으로 맑다. 미세먼지가 우리 한반도를 점령한 이후로는 서울이나 전국 어디에서든 보기 힘든 아니 볼 수 없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깨끗한 공기와 청정한 환경을 우리 인간 아니 우리 나라사람들은 언제부터 포기하기로 했던 것인가? 미세먼지의 주요원인 가운데 하나가 중국이라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산소세’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언젠가 ‘환경’이 문화나 나아가 외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때 지금의 우리가 선조라고 불리울 때 얼마나 몰상식하고 몰염치하고 사대적인 사람들로 손가락질까지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 유적 주변의 해안
스모그(smog)라는 말이 있다. 연기라는 smoke와 안개를 의미하는 fog가 결합된 말이다. 공기 가운데 오염물질이 포함되어 도시 전역 하늘에 안개처럼 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산이나 들이나 바닷가나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미세먼지로 인해 뿌연 하늘을 보게 된다. 석탄으로 인한 영국 런던 포그(스모그)로 1952년 겨울 4,000여명이 죽은 사실을 우린 이미 잊고 ‘레인코트’로 유명한 패션회사만을 기억한다. 석유 사용으로 인한 미서부의 로스엔젤레스 스모그에 이어 중국의 초고속경제성장과 자연파괴 그리고 환경오염으로 시작된 베이징 스모그도 유명하다. 이젠 그런 스모그를 비롯한 환경문제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전역을 뒤덮은 ‘미세먼지’의 유령은 언제쯤 가실 수 있을까?

일부 환경 전문가들은 대기오염 때문에 폐질환으로 조기 사망하는 사람이 최소 2,000명을 넘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연구로 유명한 영국의 석학 아놀드 토인비는 환경 즉 숲과 물을 파괴한 문명은 거의 모두 멸망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유명한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 역시 합성살충제의 오염문제를 다룬 베스트셀러 ‘침묵의 봄’(1962)에서 살충제의 과다사용의 폐해와 함께 그 뒤에 숨은 우리 인간의 욕심 즉 개발과 성장 만능주의를 지적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전히 ‘잘사는 것’뿐인가?

▲ 유적 주변의 주택가
태평양 동부에 위치한 외딴 화산섬 칠레령 이스터섬(현지어로 라파누이)에 있는 ‘모아이’라는 석상이 모두 897개나 있다. 석상들의 높이는 3미터에서 12미터 정도 되고 50톤을 넘는 거대한 석상도 있다. 과거 이곳의 족장들은 자신들의 부족이 이웃 부족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신에게 알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모아이를 건립했다고 전한다.

기원후 1000년에서 1700년대에 세워진 모아이들을 만들기 위해 2만명의 인구는 3,000명이하로 줄었다. 건립에 필요한 야자나무 등을 베다가 라파누이에 있었던 나무들은 점점 사라지고 동물들도 사라졌으며, 고래사냥에 필요한 나무도 없어져 결국 식인까지 행해졌다는 비극적인 전설도 남아 있다. 이제 환경의 시대가 되었다. 미래소년 코난이라는 만화에서도 보았듯이 우리는 미래 다음세대에게 반드시 깨끗한 물과 공기를 전해야 할 것이다.

어느 분은 여행갈 때 ‘지도는 필요없고 나침반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지도도 필요하고 나침반이 있으면 더 좋을 듯 하고, 나침반 대신 여행의 ‘목적’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듯도 싶다. 하지만, 이번 여정에서는 나침반 대신 ‘가이드’를 지도 대신에 ‘전세버스’를 선택했기에 우연이나 돌발적인 상황이 적어서 좀 많이 싱거워진 것도 사실이다. 가끔 말을 시키는 동행 어른들도 계셨지만, 들을 수 있을 때 듣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 아닌가? 꼭 창피해서 유구무언이 아니다. 언젠가 말할 기회는 오니 꼭 지금이어야 할 이유도 굳이 없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한 듯하다. 그게 바로 타이밍이라는 ‘때’가 아닐까?

▲ 유적지 모습

최윤덕 장군이 1419년(세종 원년)에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할 때, 상왕인 태종은 “대마도는 경상도의 계림에 속했고 본디 우리나라 땅”이라고 대마도 도주에게 전했다. 1488년 명나라 사신 동월이 만든 『조선부』안의 ‘조선팔도총도’와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785년 작성한 『삼국통람도설』 가운데 삼국접양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다. 그런데 이 공기좋고 물좋은 대마도가 지금은 우리 땅이 아닐까?

지금이야 물과 공기가 소중했지만 그 옛날 환경이 나쁜 곳을 찾는 게 더 힘든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피던 곳이 아니고서야 대기가 오염된 곳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하면 너무 전설의 고향같은 이야기일까? 산세가 가파르고 농사지을 곳이 부족하고 강원도 너와집처럼 지붕에 돌을 얹어야 하는 이 섬 대마도는 왜구가 숨기에 좋지 농민 등 일반백성들이 정착하며 살기에는 힘든 곳이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朝貢)을 하고 그 대가로 미곡(米穀)을 받아간 이곳의 주민들은 지금도 우리 나라 부산에 쇼핑을 와서 쌀 등을 사간다고 한다. 쌀과 세금이 재정의 원천이 되었던 조선시대. 공도(空島) 정책이라고 해서 섬을 싹 비우기까지 했던 그 시절, 대마도는 정말 굳이 필요한 좋은 땅은 아니었다. 대마도의 전략적인 가치와 미래적인 가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인물을 가지지 못한 우리 조선의 슬픔과 비극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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