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시사위크] 미국발 ‘웜비어 충격파’가 평양을 겨냥해 빠르게 번져가고 있다. 북한에 장기간 억류당했다가 최근 의식불명 상태로 송환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는 지난 19일 사망했다. 폐쇄적인 북한체제에 대한 호기심으로 방북했던 웜비어는 그의 가족들의 말대로 ‘집으로의 여행’을 매우 슬프게 끝마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웜비어의 사망에 쏠린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여론이다. 심각한 뇌손상을 입고 식물인간 상태로 돌아온 지 엿새 만에 숨진 웜비어에게 북한 당국이 과연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규명하고, 그에 따른 응분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웜비어 사망 소식을 접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잔혹한 정권(brutal regime)”이라고 비난했다.

지난해 3월 재판을 받은 뒤 식중독 증세인 ‘보툴리누스 중독증’을 보였고, 수면제를 복용한 후 코마상태에 빠졌다는 북한 당국의 설명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버지니아주립대 3학년생인 웜비어는 지난해 1월 북한 관광길에 나섰고, 평양의 양각도 호텔 복도에 걸린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또 같은 해 3월 체제전복 혐의로 15년 노동교화형을 받았다. 북한 당국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고 관리됐을 그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설명해야 할 의무는 북한 측에 부여됐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 김정은 정권은 무모한 핵 위협과 미사일 도발로 체제 고립을 자초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북한 관영 선전매체와 군부의 핵심들은 미국 본토 타격을 공언하며 트럼프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도 최고수준으로까지 수위가 높아진 상태다. 북한의 후견국을 자처해온 중국도 김정은 체제가 레드라인을 넘을 경우 초강력 제재가 따를 것임을 예고하는 분위기였다. 여기에 웜비어 사망 사태는 결정타일 수 있다.

웜비어 장기억류와 사망 사태는 북한의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성이 행동대 역할을 했을 것이란 게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방북 미국인이 관련된 사건을 ‘적발’해 부풀리고 조작하는 일이 공안기관 개입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보위부를 쥐락펴락해온 김정은이 최종 책임자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북한으로선 자칫 불똥이 김정은에게 튀는 형국을 맞을 가능성을 제일 걱정할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보위성은 위기에 몰려있는 상황이다. 보위성은 무리한 수사로 노동당 과장급 간부를 숨지게 하는 등의 전횡으로 김정은의 진노를 샀고, 김원홍 보위상이 지난 1월 대장 계급에서 강등당하고 해임되는 조직의 위기를 맞았다는 게 우리 정부 당국의 판단이다. 지난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발생한 김정남(김정은 이복형) 암살 사건에도 보위성은 깊숙이 관여했다. 이 때문에 김정은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테러를 저질렀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보위성의 무리수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지난 5월에는 이른바 보위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한국의 국가정보원(NIS)이 김정은 제거작전을 벌이려했다고 주장했다. 보위성은 “우리(북) 최고 수뇌부를 상대로 생화학 물질에 의한 국가테러를 감행할 목적 밑에 암암리에 치밀하게 준비해 우리 내부에 침투시켰던 극악무도한 테러범죄 일당이 적발됐다”고 한 것이다.

2014년 6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일하던 북한 벌목공 김모 씨를 한·미가 매수해 “금수산태양궁전행사(김일성·김정일 시신 보관 시설)와 열병식, 군중 시위 때 우리 최고수뇌부를 노린 폭탄테러를 감행할 모의를 했다”는 게 보위성의 발표지만, 당장 의혹이 제기됐다. 너무나 엉성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이란 점에서다. 무엇보다 한·미 당국이 김정은 암살을 위해 러시아에서 일하던 북한 벌목공을 포섭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따져 봐도 황당무계한 이야기란 걸 금방 알 수 있다.

북한이 이처럼 국제사회에서 코너에 몰리면서 외교관들은 죽을 맛이라고 한다. 외교무대에서 싸늘한 눈총을 견뎌내야 하고, 평양의 주문에 따라 엉터리 기자회견이나 억지주장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건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다. 지난 2월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김정남 피살 사태가 터지자 강철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소속 외교관까지 범행에 가세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국제사회와 언론의 눈길이 쏠렸지만 “사망한 건 김정남이 아닌 북한 공민 ‘김철’(김정남의 여권상 이름)”이라 버텼다. 불똥이 김정은에게 튀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북한 김정은은 올 들어 도발 수위를 부쩍 올렸다. 겉으로 “어떤 제재에도 굴하지 않겠다”며 결사항전 의지를 밝히지만,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진단이 정부 당국에서 나온다.

특히 전폭기와 항공모함 등 미국의 막강한 전략자산이 한반도에 전개되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자칫 대북 정밀타격 등으로 독재권력의 파국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집권 6년차에 접어들었지만 해외 지도자와 제대로 된 정상회담 한번 하지 못했다. 해외에 한 차례도 나가지 못할 정도로 국제 외교무대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상태다. 옛 소련과 중국은 물론 동구권, 동남아 국가를 중심으로 비교적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인 김일성과 비교하면 낙제점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은의 마이웨이식 도발 행보는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 추진에도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우리의 자위력 강화 조치(핵과 미사일 개발을 의미)는 미국에서 행정부가 교체되고 남조선에서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 중단되거나 속도가 늦춰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라며 제 갈 길을 가겠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핵과 미사일 도발의 몸값을 최대한 올리고 향후 협상에서도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겠다는 의도 속에 문재인 정부와의 관계도 당분간 냉각기로 가겠다는 의도가 읽혀진다.

이런 상황에서 돌발변수로 터진 웜비어 사망 사태는 가뜩이나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남북관계의 복원에 어려움을 한층 더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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