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원이 러시아 제재안을 압도적인 찬성표로 가결시키면서 러시아에 호의적이었던 트럼프 대통령의 입지도 애매해졌다. 지난 G20 회의에서 환담을 나누는 트럼프와 푸틴. <뉴시스/AP>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미 하원은 25일(현지시각) 러시아·이란·북한에 보다 강력한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무력행동을 일삼았던 국가들에 대한 제재가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된 가운데 유럽 국가들은 무역장벽의 확대를 규탄하고 나섰다.

◇ ‘문제국가’에 대한 무역제재, 트럼프도 제재 대상

법안이 하원을 통과한 25일 CNN과 BBC 등 주요 외신들은 새 제재안의 내용과 시사점을 분석한 기사를 발표했다. 러시아는 크림 반도 합병과 사이버범죄를 이유로 받아왔던 제재조치가 심화됐다. 러시아의 철도·선박·철강·광산산업에 대한 추가제재가 새 제재안에 명시됐으며 러시아 석유회사와 거래하는 기업들도 규제 대상이 됐다. 이란의 경우 탄도미사일 개발이 주요 제재 대상이었으며, 북한은 핵미사일개발 제재와 함께 비인도적 고용실태를 이유로 노동자의 해외 취업이 금지됐다.

하원은 이번 제재안을 419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하원에서 반대표가 3표에 불과해 ‘압도적인 통과’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상원은 지난 6월 제출된 러시아 제재안을 98표의 찬성으로 채택했던 경험이 있어 제재안 통과를 위한 초당적 협의 분위기가 이미 형성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다만 제재안이 얼마나 빨리 상원을 통과할지는 불확실하다. 양당의 입법자들은 여름 휴회 전까지 법안을 백악관에 제출하는 것을 목표했지만 아직 상원이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CNN는 법안을 수정하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낸 밥 코커 상원 외교위원장과 “기존 제재안과 새 수정안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상원의원들이 있다”는 엘리엇 엔젤 민주당 하원의원의 발언을 기사에 실었다. 무엇보다 현재 미국 정치계의 가장 큰 의제는 ‘오바마케어’의 개편을 둘러싼 건강보험법 문제인 만큼 제재안이 필요한 만큼의 관심을 사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번 제재안은 백악관이 자의로 제재조항을 수정하거나 폐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 의회가 3개국 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까지 견제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법안 시행 후 대통령이 세부사항을 수정하고 싶다면 의회에 사유를 설명하고 조정과정을 거쳐야 한다. 백악관은 이에 대해 “검토 중이다”며 말을 아꼈다.

◇ 미국인만 동의하는 규제안? 심화되는 유럽-미국 무역마찰

다수의 매체는 백악관 앞에 놓인 선택지가 많지 않다고 분석했다. 새 제재안이 상원마저 통과해 백악관에 제출될 경우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CNN은 “대통령 거부권을 기각시킬 만한 충분한 표가 있다”는 양당 의원들의 발언을 근거로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안의 통과를 막을 수 없다고 봤다. 상원과 하원에서 모두 3분의 2 이상의 의원이 찬성한다면 의회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기각시킬 수 있다.

BBC는 25일 기사에서 그동안 러시아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준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안마저 거부할 경우 역풍만 더 거세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스티브 피퍼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은 BBC를 통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상당한 반발을 초래할 것이다”고 내다봤으며 하원의 압도적인 찬성표가 이를 뒷받침했다. 정치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강경발언들을 쏟아내 왔던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도 이번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BBC는 같은 기사에서 유럽의 반응을 상세히 보도했다. 우선 직접적인 제재대상국인 러시아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러시아 외무부 차관인 세르게이 리브코프는 하원 표결 전 해당 제재안을 “협력의 토대 밑에 깔린 지뢰와 같다”고 표현했다. 리브코프 차관은 이어서 “미국 의회에 만연한 ‘러시아 공포증’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미국 정치계의 반 러시아 기조에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불똥은 러시아 시장 개척에 나선 유럽 국가들에게도 튀었다. 러시아 에너지 산업을 주요 목표물로 설정한 이번 제재안은 러시아의 광대한 에너지인프라시장을 노렸던 유럽 기업들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독일은 이미 러시아와 가스관을 연결하는 ‘노드스트림2’ 사업의 공사에 착수한 상태다. BBC는 “이번 제재안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관계에 새 갈등요인이 될 수 있다. 유럽의 에너지공급 문제는 유럽의 것이지 미국의 문제가 아니다”는 지그마어 가브리엘 독일 외무장관과 크리스티안 케른 오스트리아 수상의 25일자 발언으로 유럽의 반응을 정리했다.

뉴욕 타임즈도 25일 기사에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불신이 유럽연합의 걱정을 더욱 키웠다”며 격양된 유럽의 분위기를 전했다. 마가리티스 쉬나스 유럽연합 대변인은 미국의 단독제재안 발의를 비난하며 G7의 의견일치를 통한 제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뉴욕타임즈는 “미국이 보호무역에 나선다면 유럽연합도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고 발언한 적 있는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관료회의를 소집하고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혀 무역마찰의 심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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